전두환은 죽었지만 죽지 않았다, 그들 때문에

IE002901273_STD.jpg
 
퇴임 9개월 뒤인 1988년 11월 23일 국민의 분노를 피해 설악산 백담사에 은둔했던 전두환이 정확히 33년 뒤인 지난 23일 연희동 자택에서 만 90세 나이로 쓰러졌다. 그의 정치적 궤적은 흔히 1979년 10월 26일로부터 서술되지만, 그가 역사에 끼친 해악은 그 이전과 이어진다. 그 정치적 행적은 박정희는 물론이고 이승만과도 닿는다.
 
박정희는 1960년 4·19 혁명을 짓밟고 일어섰다. 4·19는 동학혁명으로 대표되는 구한말 개혁운동과 3·1 운동으로 대표되는 항일운동을 계승했다. 박정희의 1961년 5·16 쿠데타는 이런 흐름을 짓밟고 역사를 반동(反動)시켰다. 역사의 시곗바늘을 회귀시키는 이 같은 반동은 이승만에 의해서도 일어났다. 그는 항일운동 흐름이 한반도 전역에 걸친 자주독립국가 건설로 이어지는 것을 차단했다. 그 이승만을 4·19가 무너트렸지만, 뒤이어 박정희가 4·19를 무너트림으로써 이승만 시대는 상당 부분 되살아났다.
 
백담사 은둔 33주년에 쓰러진 전두환 역시 이승만·박정희의 계승자라 할 수 있다. 그 역시 한국 현대사를 과거로 회귀시켜 박정희 시대를 상당 부분 되살리고 이를 통해 이승만 시대 역시 되살려놓았다. 이들의 시대에 경제·정치적 이익을 얻은 세력은 전두환을 지지했다. 그런 세력을 자신의 기반으로 만들어놓았다는 점에서도, 전두환은 그 둘의 계승자다.
 
계승자

박정희의 최후는 엄밀히 말하면 김재규에 의한 10·26보다는 국민에 의한 10·16에 의해 더 많이 좌우됐다. 유신체제에 맞서 마산과 부산을 중심으로 일어난 부마민주항쟁(부마항쟁)이 박정희 체제를 위협하고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마음까지 흔들어놓았다. 박정희를 쏜 뒤인 1980년 1월 28일 작성한 '항소이유 보충서'에서 김재규는 "부마사태는 그 진상이 일반 국민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굉장한 것"이었다며 "순수한 일반 시민에 의한 민중봉기"로 높이 평가했다. 10·26이 10·16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전두환이 거스른 것 역시 10·26과 더불어 10·16이었다고 봐야 한다.
 
그 두 사건이 추동하는 새로운 흐름을 전두환은 12·12 쿠데타로 일단 막아냈다. 하지만 그 직후 일어난 1980년 '서울의 봄'은 그 흐름이 12·12로 차단될 수 있는 게 아님을 증명했다. 그래서 전두환은 1980년 봄의 민주화운동에 대해 5·17이라는 또 하나의 쿠데타로 대응해야 했다.

그러나 12·12는 물론이고 5·17로도 역부족이었다. 5월 18일 광주에서 폭발한 대규모 항쟁은 두 차례 쿠데타로도 막기 힘든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반영했다. 전두환이 앞선 쿠데타 두 건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대규모 학살을 자행한 것은, 그런 거대한 흐름을 저지하기 위한 발악이었다.
IE002901383_STD.jpg

두 차례 쿠데타와 한 차례 학살 끝에 전두환은 역사를 과거로 되돌려놓는 데 간신히 성공했다. 10·16과 10·26에 의해 붕괴될 뻔했던 구체제를 가까스로 수습한 것이다. 이를 통해 박정희의 유산 중 상당 부분이 훼손되지 않고 전두환 체제로 승계됐다. 죽은 박정희가 되살아난 것이다.
 
그 같은 역사의 반동으로 한국 현대사는 최소 13년 이상 퇴보했다. 헌법 제1조에 따라 국민의 공화국이 구현되기는커녕 헌법 1조를 짓뭉개는 '전두환의 공화국'이 세워졌다. 전두환의 나라는 1988년까지 이어지다가 노태우의 나라로 모습을 바꿔 1993년 2월까지 계속됐다.
전체 내용보기
팔복5112 | 경기도 파주시 송화로 13 | 대표이사 강수현
사업자등록번호 593-38-00301 | TEL: 070-7716-8524 | MAIL: master@hinews.co.kr
Copyright by HINEWS.net all reserved.